가장 중요한 정치윤리 ‘출처’< 出處 >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정당마다 내년 4월 총선 준비가 한창이라고 언론이 전한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제까지 사례로 보면 선거 전 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던 정당이 선거에서 대개 이겼다고 말한다. 그와는 별도로 여당과 야당에서 이미 여러 명이 선거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출마 포기란 본인에게는 정치적 물러남인데, 그것의 함의는 간단하지 않다.

[역사와 현실]가장 중요한 정치윤리 ‘출처’< 出處 >

조선시대 지식인과 관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윤리는 출처(出處)였다. 출처는 그들 삶의 윤리적 원칙에 가까웠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섬세한 분별과 스스로에 대한 성실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출(出)은 조정에 나와 벼슬하는 것이고, 처(處)는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벼슬할 수 있음에도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출’은 사람들이 대개 원하는 것이니 출처 원칙의 핵심은 ‘처’에 있었다. ‘처사(處士)’는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출처와 관련하여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잠곡 김육이 보여준 차이는 흥미롭다. 거기에는 각자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개인의 정체성이 함께 녹아 있다. 조광조는 중종 10년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하기 시작했다.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죽음을 맞기까지 불과 4년 조정에 있었을 뿐이다. 그사이에 그는 승진을 거듭하여 마지막에는 종2품 대사헌이 되어 있었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빠른 승진이었다. 그것은 중종 임금의 전폭적 지지의 결과였다. 그러던 그가 하루아침에 중종에게 버림받고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았다. 이황은 조광조의 비극적 죽음의 원인을 출처와 관련해서 해석했다. 제자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실로, 물러나려 했지만 길이 없어서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러남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이황이다. 그는 심지어 자기 호에 물러날 ‘퇴(退)’를 넣기도 했다. 그가 물러남이 갖는 깊은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평생 ‘사화’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19살 예민한 시기에 그는 자기 세대의 우상이었던 조광조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유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로서 과거시험을 포함한 정치적 지향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정치는 정녕 위험하고 무서운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면서도 정치적 명분에서 일탈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물러남이었다.

조광조가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었다면, 이이는 물러나지 않아야 할 때 물러났을지 모른다. 이이는 선조 7년 그 유명한 ‘만언봉사’를 올렸다. 그것은 이전 시대와 달라진 사림 전체의 정치적 목표와 임무에 대한 선언문이었다. 하지만 조정 동료들에게는 몹시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이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자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조정에 계속 머무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고민에 대해 주위에서는 입장이 나뉘었다. 조정 동료와 선배들은 그래도 조정에 남아야 한다는 쪽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이이가 가졌던 확고한 위상 때문이다. 반면에 친구 성혼은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선비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조정에 머무는 것은 구차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이는 결국 성혼 말대로 물러났다.

이이가 물러나기로 결정하자 그를 만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이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조정에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또한 자신이 물러나도 이미 조정은 사림이 장악했기에 구시대 인물들이 복귀할 가능성은 없다. 조정이 당분간 시끄럽기는 해도 그럭저럭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낙향한 이이는 5년 뒤 조정에 복귀할 때까지 저술과 교육에 힘썼다. 그가 물러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정치인보다는 지식인의 정체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조광조와 처지가 달랐다. 조광조는 이황 말대로 물러나려 해도 길이 없었다. 자신이 물러나는 순간, 구세력이 조정을 장악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김육은 자신의 물러남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효종 즉위 후 김육은 대동법 개혁을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조정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당시 재야사림의 영수인 김집이 조정에 올라와 있었다. 조정에서의 영향력 면에서도 그가 김육보다는 앞섰다. 그런 그가 대동법 실시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동법 실시를 놓고 두 사람이 날카롭게 갈등하던 중 김육은 돌연 조정을 떠나 낙향했다. 그러자 효종 임금은 여러 차례 김육을 다시 불렀다. 김육은 임금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창을 들고 끓는 물과 타는 불 속으로 뛰어들라고 한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겠지만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고 뜻이 펴지지 않는데도 그 직책만을 영화롭게 여겨서 조정에 나갈 수는 없다고 왕에게 말했다. 1년 뒤 그는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그사이에 그는 개혁 추진의 명분을 확보했고, 조정에 복귀하자 바로 대동법을 추진하여 성립시켰다. 그는 물러남을 통해서 개혁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조광조와 이이가 원칙에 충실한 지식인에 가깝다면 김육은 정치인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면 바른 지식인 되기도 어렵지만 좋은 정치인 되기는 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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